무용하는 척, 활 쏘아 원나라 장수들을 죽인 '이 인물'

2022. 9. 15. 10:02지식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태조(1335년~1408년) 이성계는 고려 말 무신이자, 조선을 건국한 초대 왕(재위: 1392년~1398년)으로 1335년(충숙왕 후 4년) 화령 흑석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대중적으로는 다른 역대 국왕과 달리 '태조'라는 묘호보다 '이성계'라는 이름이 더 유명하며 후일 대한제국의 고종이 그를 황제로 추존하게 됩니다.

[용비어천가]의 육룡 중 첫 번째 용이자, 조선 개창의 시발점이 된 인물은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목조)였습니다. 이안사는 스무 살 무렵 관기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전주 지주사(주의 으뜸벼슬)가 이 관기에게 조정에서 보낸 산성별감의 수청을 들라 명하지만, 이안사를 너무 사랑했던 그녀는 수청을 거부하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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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지주사는 관기를 죽인 죄를 이안사에게 뒤집어씌우면서 그는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 이안사는 고향인 전주에서 삼척으로 떠났으며, 그를 따르던 170여 호의 전주 사람들과 함께 가게 됩니다.

이안사 일가는 삼척에 머물면서 전주 지주사나 산성별감이 관직을 그만두거나 죽길 기다렸지만, 오히려 산성별감이 강릉도 도지사 격인 안렴사로 승진해 삼척에 부임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리자, 도망치듯이 다시 북쪽의 동북면 의주로 이주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이안사를 따라간 이들의 후예들이 그의 일가와 공동운명체를 이루게 되고 후일 이성계의 친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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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사가 의주에 기반을 만들고 지내던 어느 날, 몽고군이 여진족을 쫓아 만주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때 몽고군은 여진족을 공격하는 한편 고려인을 회유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휘, 이안사였습니다. 그중 조휘는 원 간섭기 당시, 원이 직접 관리 및 통치한 쌍성총관부의 초대 쌍성총관으로 임명되었고, 이안사는 원나라의 다루가치이자 천호가 됩니다.

이후 이성계의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에 이르기까지 원나라의 관직을 대대로 세습하였고, 아버지 이자춘도 이를 물려받게 됩니다. 하지만 원나라에서 만주 지역의 호적을 정리하면서 원주민을 우대하고 이주민을 홀대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이성계 일가의 오랜 원나라 생활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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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4년(1355년), 이자춘이 고려에 귀부 의사를 밝히자 공민왕은 그를 크게 반기고 환대했으며, 이듬해 3월 아들 이성계를 데리고 개경을 다시 방문하게 됩니다.

이후 이자춘은 쌍성을 수복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돌아가고 이성계는 홀로 개경에 남게 되는데, 이는 일종의 볼모로 잡힌 것이었습니다. 이때 이성계는 신기에 가까운 격구 솜씨를 보이게 되는데, 거의 100년 만에 귀향한 격구 천재의 집안이 훗날 고려 왕조를 무너뜨릴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이때만 해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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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게 되고, 쌍성을 수복한 직후인 재위 5년(1356년) 이자춘을 대중대부 사복경으로 삼고 개경 저택을 내려줍니다. 이렇게 개경 귀족인 된 이자춘이었지만, 그에게는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했습니다.

이자춘은 동북면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공민왕에게 요청했고, 그를 믿을 수 없다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은 부탁을 들어주게 됩니다. 이자춘은 동북면 병마사 호부상서의 관직을 받고 북방으로 돌아갔으며, 공민왕의 믿음에 부응하면서 사태를 관망하던 동북면 사람들을 설득해 고려 쪽으로 돌려놓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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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자춘은 이 지역의 세력을 확대하면서 그의 아들인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할 수 있는 기반을 닦게 됩니다. 공민왕 10년(1361년)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당시 이성계는 27세였으며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이는 부친이 47세의 한창 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자춘이 세상을 떠나자 공민왕은 크게 애도하면서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부의를 표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할 틈이 없었습니다. 이자춘이 죽은 지 5개월 정도 지난 공민왕 10년(1361년), 고려 북쪽 독로강 만호 박의가 고려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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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형부상서 김진에게 토벌을 명하지만, 실패하면서 이자춘의 후사인 이성계에게 토벌을 명하게 됩니다. 당시 금오위 상장군이자 동북면 상만호였던 이성계는 최정예인 친병 1,500명을 이끌고 독로강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 친병은 이성계 일가의 사병이자 운명공동체로, 그의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이성계는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독로강까지 진격하게 되고 전투에 승리하게 됩니다. 또한 패배한 박의가 도주를 하게 되지만, 끝까지 쫓아가 그와 그의 부하들의 목을 베면서 부친을 대신해서 치른 첫 전투에서 합격점을 받게 됩니다. 이는 이성계가 부친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는 사실을 실력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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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년 전인 공민왕 8년(1359년) 12월, 원나라 군사들에게 쫓긴 모거경의 4만 홍건군(홍건적)이 고려로 들어오게 되고, 밀려 내려온 그들로 인해 서경이 함락당하게 됩니다. 이듬해 1월, 겨우 서경을 탈환하게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0만의 홍건군이 밀고 들어오게 됩니다.

고려의 절령 방어선은 곧 무너지게 되고, 파죽지세로 남하한 홍건군은 개경을 위협하게 됩니다. 위기에 처한 공민왕은 개경을 버리고 광주를 거쳐 복주(현재의 안동)까지 파천을 했으며, 자칫 왕조가 망할 위기에 몰리자 공민왕은 나라의 모든 자원을 끌어모아 개경 탈환 작전에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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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박의를 토벌해 조정에 인정받은 이성계는 개경 동쪽의 공격을 맡게 되면서 친병 2,000명과 함께 이 작전에 투입됩니다. 각도에서 20만 명의 농민들을 끌어모을 정도로 총력전을 벌인 고려군은 공민왕 11년(1362) 1월, 개경을 겨우 탈환하고 홍건군의 핵심 인물인 관선생, 사유 등을 잡아 죽이게 됩니다.

하지만 개경을 탈환한 다음 달, 원나라 심양 행성승상 나하추가 동북면을 공격하면서 고려는 다시 한번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렇게 나하추를 끌어들인 인물은 쌍성총관부 초대 총관으로 임명된 조휘의 후손이자, 4번째 총관을 맡았던 조소생으로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으로 인해 원나라로 도주한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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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생은 홍건적 침입으로 고려가 혼란한 틈을 타 쌍성을 되찾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원나라의 명문가 귀족 출신이자, 만주지방에 세력을 떨친 심양 행성승상 나하추를 끌어들이게 됩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공민왕은 곧바로 도지휘사 정휘를 보내지만, 처참히 패배를 당하게 되자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해 싸우게 합니다.

비로소 부친의 관직을 이어받은 이성계는 원나라와 싸우기 위해 출정을 하게 되는데, 싸움터가 자신의 근거지인 동북면이기에 그는 전력투구하며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이성계는 화려한 무용을 뽐내며 활을 쏘아 원나라 장수들을 연이어 사살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함흥평야에서 나하추의 군대를 패퇴시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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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나하추가 도주하면서 그를 죽이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동북면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고려에서의 이성계의 입지가 크게 강화가 됩니다. 세월이 흘러 공민왕 19년(1370년), 이성계는 기병 5,000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게 됩니다. 당시 이성계의 나이는 어느덧 36세였으며, 그가 부친의 자리를 대신한 7~8년 동안 고려의 내외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주원장이 1368년(공민왕 17년) 명나라를 건국하게 되고, 그가 즉위한 해 4월, 장군 서달을 북상시켜 원나라를 대도에서 쫓아내 초원지대로 물러나게 합니다. 결국 원나라는 실질적으로 북원으로 축소되고 명나라가 패권을 잡으며 동아시아의 정세가 요동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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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공민왕은 발 빠르게 움직여 주원장의 즉위를 축하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여전히 위협적이었던 원나라 잔존 세력들을 축출하기 위해 이성계를 북쪽으로 보내게 됩니다.

이후 이성계는 여러 전투에서 계속 군공을 세우게 되고, 공민왕은 재위 20년(1371년) 이성계를 종 2품 지문하부사로 삼게 됩니다. 37세의 나이에 문관 고위직인 지문하부사까지 올랐지만, 이성계는 자신의 뿌리가 문관이 아닌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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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려가 자신의 무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홍건적에 이어 왜구들까지 고려를 공격하면서 이성계의 역할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이성계는 일종의 고려의 구원투수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홍건적이 밀려오거나 왜구가 침입할 때마다 공민왕은 이성계를 최전선으로 보내면서 그의 존재감은 점점 커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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