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케미를 보여준 조선 왕실 부부 TOP4

2022. 10. 4. 13:19지식

최악의 케미를 보여준 조선 왕실 부부 TOP4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 TOP4 영조와 정성왕후 ] 조선시대 최악의 부부관계를 보여준 왕과 왕비. 조선의 제 21대 왕 영조와 그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는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던 왕과 왕비로 영조는 51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정성왕후도 33년간 왕비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래된 부부였지만 정작 둘 사이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했다고 합니다. 야사에 따르면 행복해야 될 혼인 첫날밤, 연잉군이 그녀의 손을 보고는 왜 이리 고우냐고 물어보자 고생을 안 한 덕에 손에 물을 묻히지 않아 그리하였다고 대답을 하니 연잉군은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와 자신의 출신을 깔본 것으로 간주하고,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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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1724년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보위에 오르게 됩니다. 영조와 정성왕후는 최고의 위치인 왕과 왕비가 되었지만, 부부관계는 여전히 최악이었습니다. 영조는 정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보내고 자신은 경희궁에 머물며 거의 정성왕후를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질고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정성왕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왕비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됩니다. 또한 자식이 없던 그녀는 영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도세자를 무척 아껴 둘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해 평생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붕당의 소용돌이에서 사도세자를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착하면 오히려 손해, 조선도 마찬가지… 너무 착해 왕이 어울리지 않았던 인종

조선시대 가장 불쌍하고 착했던 왕. 인종은 조선 제12대 왕으로 중종과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인 장경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나게 되고 동복형제로는 누나 효혜공주가 있습니다. 인종은 3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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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륜을 저버리고 자신의 아들을 죽여달라고 간청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사연은?

영빈 이씨(1696년~1764년)는 조선의 제21대 왕인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어머니로 정조의 친할머니입니다. 그녀는 영조가 가장 총애하였던 후궁이자 두 번째 후궁으로 알려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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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성왕후에 대한 영조의 무관심은 그녀의 환갑 때에도 나타났습니다. 1752년 당시 그녀는 환갑이 되었지만, 영조는 대왕대비인 인원왕후와 대립하며 온 나라가 떠들썩한 전위 소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로 인해 정성왕후는 인생의 가장 큰 경축일인 환갑을 맞았지만, 아무런 행사 없이 보내게 됩니다. 1757년 정성왕후는 큰 중병에 걸리게 되고,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비로소 영조는 병소로 찾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정성왕후를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아들 사도세자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만 꾸짖게 됩니다.

 

“남편 하나 잘못 만나서 이렇게 됐어요” 최고의 배경에서 최악을 겪은 조선의 왕녀

경현공주는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의 딸로 어머니는 조선시대에 가장 강한 권력을 가졌던 왕비 중 하나인 문정왕후였습니다. 그녀의 친동생은 조선 제13대 왕인 명종이었으며 이복 오빠는 제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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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의 후궁도 모자라 새어머니에 ‘이런 짓’까지? 고려 최악의 폭군 ‘충혜왕’

충혜왕(1315년~1344년)은 고려 제28대 왕으로 휘는 정, 몽골 이름은 부다시리(보탑실리)이며 원에서 내린 시호는 충혜왕, 동생인 공민왕이 올린 시호는 헌효대왕입니다. 그는 연산군에 가려 잘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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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성왕후는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곧바로 그녀의 장례절차를 진행해야 했지만 공교롭게도 이날 영조가 사랑하는 딸인 화완옹주의 남편, 정치달이 죽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아내의 죽음에 형식적인 슬픔을 표한 뒤, 아무런 논의 없이 서둘라 부마의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영조는 왕비의 죽음 앞에서도 비정했었고, 정성왕후는 죽어서도 남편의 사랑과 관심을 얻지 못한 비운의 왕비였습니다.

 

최고의 악녀라고 불린 소용 조씨, ‘그녀는 어떻게 왕의 총애를 받았나’

소용 조씨( ?~1651년)는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의 후궁으로 일반적으로 소용 조씨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녀의 최종 품계는 종1품 귀인이기에 공식적으로는 귀인 조씨로 불립니다. 소용 조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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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P3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장희빈 ] 숙종은 역대 조선 왕들 중 가장 왕권이 강했던 왕으로 재위 기간도 45년으로 아들인 영조 다음으로 가장 오래 집권하게 됩니다.  숙종은 그의 여인인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그리고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와 함께 사극과 같은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희빈 장씨만 악녀이고 착한 숙종은 끌려다녔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숙종은 그리 유약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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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보통이 아니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고 심지어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만지는 것조차 싫어해 그녀는 빗으로 때려가면서 머리를 손질했다고 합니다. 그는 대단히 신경질적인 성격이었으며 희로애락을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빈 장씨와의 사랑이 그렇게 불같이 극단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희빈 장씨의 등장은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요절한 뒤로 기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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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대비전 궁녀였던 희빈 장씨가 숙종의 승은을 입고 총애를 받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는 출신이 천하고 성품이 극악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강제 출궁시킵니다. 희빈 장씨가 출궁된 직후에 계비 간택령이 내려졌고, 인현왕후 민씨가 간택돼 왕비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명성왕후가 승하한 후 희빈 장씨는 5년 만에 정식 후궁으로 화려하게 궁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궁으로 돌아온 장씨를 향한 숙종의 총애가 지극하자 서인과 인현왕후의 반발이 격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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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희빈 장씨가 훗날 경종이 되는 숙종의 장남 균을 낳게 되고 숙종은 보란 듯이 원자로 책봉하게 됩니다. 이에 집권을 하고 있던 서인들은 더욱더 반발하고, 이를 빌미로 숙종은 서인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하면서 쫓겨났던 남인들을 불러 정계를 독점시키는 기사환국을 일으킵니다. 또한 이 모든 원인을 인현왕후에게 몰아 그녀 역시 폐서인 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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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희빈 장씨는 조선왕실에서 유일하게 궁녀출신으로 왕비에 오르는 여성이 됩니다. 하지만 5년 후 숙종은 다시 남인을 내치고 서인들을 불러들여 정권교체를 단행하는 갑술환국을 일으킵니다. 이로 인해 인현왕후는 5년 만에 재입궐을 하게 되고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이유로 희빈 장씨는 다시 빈으로 내려가는 굴욕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남인들의 처분을 둘러싸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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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년 지병을 앓고 있던 인현왕후가 사망하게 되자 국상을 준비함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희빈 장씨를 다시 왕비로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됩니다. 이는 인현왕후를 지지하고 있던 노론과 같은 세력이었던 숙빈 최씨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결국 숙빈 최씨는 희빈 장씨가 신당을 설치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왕에게 발고하였고, 숙종은 이를 빌미로 희빈 장씨의 오라버니인 장희재를 처형하고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하게 됩니다. 숙종은 다혈질에 불같은 사랑을 하는 왕이기도 했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 사랑을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비정한 남편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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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P2 태종과 원경왕후 ] 태종 이방원은 조선 제3대 왕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왕이었습니다. 또한 태종의 정비였던 원경왕후는 뛰어난 결단력으로 남편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왕위에 오르는데 크게 기여했던 인물입니다. 이방원은 아내이자 최고의 정치적 파트너인 그녀를 존중했고, 4남 4녀를 둘 정도로 나쁘지 않은 금슬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태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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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외척을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후궁을 계속 늘렸고, 남편에 대한 독점욕과 질투심이 굉장히 강했던 원경왕후는 끊임없이 남편과 싸우게 됩니다. 다툼이 격해지자 태종은 원경왕후를 모시던 상궁들과 나인들을 모두 궁 밖으로 내보내고, 그녀를 교태전에 유폐하다시피 합니다. 이렇게 태종과 원경왕후의 갈등은 끝을 달리게 되고, 결국 왕비의 남동생인 민무질, 민무구 형제가 사사되는 등 남편에 의해 친정이 멸문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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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왕후는 외척을 극도로 견제했던 태종에게 남동생 4명을 모두 잃자 모든 걸 체념하고, 아들인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성녕대군을 바라보고 사는 박복한 여인이 됩니다. 시간이 흘러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에 오르면서 4년 동안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고 세종을 도와주게 됩니다. 여전히 외척을 경계한 태종은 며느리 소헌왕후의 친정 집안까지 멸문시키게 되면서 원경왕후와 며느리 소헌왕후는 동병상련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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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정몽주를 죽이고, 30대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40대에 처가를 멸문시키고, 50대에는 사돈가문을 날려 버릴 정도로 강했던 태종과 조선시대 왕후 중 최고의 여장부로 불릴 정도로 기가 센 원경왕후의 불화는 예견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부부의 극단적인 불화 속에서 조선 최고의 성군이자 애처가였던 세종대왕이 나온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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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P1 성종과 폐비윤씨 ] 조선 전기의 제도 및 문물 정비를 완성시킨 명군으로 불리는 성종은 안정적인 유교정치를 시행하였고 수많은 정치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성종은 자신의 가정사가 실패하면서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후환을 남기게 됩니다. 성종은 1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녀들은 16남 12녀를 낳게 됩니다. 성종이 승하한 나이가 38세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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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부인들 중 첫 번째 부인인 공혜왕후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중전 자리를 두고 후궁들끼리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임신 중이었던 숙의 윤씨가 왕비로 간택이 됩니다. 하루 아침에 후궁에서 왕비가 된 그녀는 곧바로 원자인 연산군까지 낳으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했지만, 성종이 다른 후궁의 처소를 자주 드나드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투기를 벌여 사달이 나게 됩니다. 야사에서는 성종과 왕비가 후궁 문제로 다투다가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바람에 인수대비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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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전 윤씨는 왕비에 오른 지 1년도 안 되어 폐비론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선은 세자를 생각하라는 신하들의 주청으로 그녀는 왕비의 자리를 지키게 되지만 독약을 상비하고 다니는 등 더 과격해진 행동을 보이며 다시 위기를 맞게 됩니다. 또한 중전 윤씨는 세 분의 엄청난 시월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윗전이었던 대왕대비 정희왕후, 왕대비 소혜왕후, 왕대비 안순왕후는 이런 모습을 그냥 넘길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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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성종의 생모였던 인수대비는 유교적 여성관을 담은 내훈이라는 책을 만들 정도로 현재 시월드의 창시자로 불릴 정도의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경쟁관계에 있던 성종의 다른 후궁들이 인수대비를 찾아가 그녀의 폐위를 부추기자 결국 성종의 의지와 윗전의 승인으로 윤씨는 폐비가 됩니다. 인수대비는 원자가 더 자라서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얼굴을 기억할까 봐 새 중전을 서둘러 세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후궁 중 숙의 윤씨를 왕비로 책봉시키는데 그녀가 바로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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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윤시가 폐비가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반성하며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그녀를 살려두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성종의 후궁인 숙의 엄씨와 귀인 정씨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인수대비와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사사가 결정됩니다. 폐비 윤씨는 1482년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으며 야사에서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피가 묻은 적삼을 어머니한테 건네며 '세자가 자라거든 이를 전달해 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극단적인 부부관계와 강했던 시월드로 인해서 성종과 윤씨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결정은 후일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최악의 폭정을 일으키는 불씨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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