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친누나, 조선왕조실록이 경국지색이라 극찬한 경안공주는 누구?

2022. 8. 18. 11:00지식

세종대왕의 친누나, 조선왕조실록이 경국지색이라 극찬한 경안공주는 누구?

경안공주(1393년~1415년)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의 딸로 1393년(태조 2년)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4남 4녀 가운데 3녀로 태어나게 됩니다. 태종과 원경왕후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알려진 그녀에 대해 실록에서는 이렇게 전해집니다.

“궁주(경안공주)는 임금의 셋째 딸인데, 나면서부터 정숙하고 예뻤으며, 총명과 지혜도 보통 사람과 달라서, 임금(태종)과 중전(원경왕후)의 사랑을 한데 모았었다.” [태종 15년(1415년) 4월 22일]

그리고 경안공주는 그녀의 동생 충녕대군(세종)과 천성과 기품이 서로 닮았기에 왕실에서는 그 뛰어남을 이를 때 항상 함께 언급하게 됩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경안궁주에 책봉된 그녀는 1403년(태종 3년) 11세의 나이로 대학자 권근의 아들인 권규과 혼인하게 되었고 이때 부마 권규는 길천군에 봉해집니다.

 

왕권에 대한 야심이 빚은 비극, 사후에도 태종의 분풀이 대상이 됐던 ‘신덕왕후’

신덕왕후(1356년~1396년) 강씨는 조선의 제1대 왕 태조의 왕비로 태조 이성계의 정치적 조언자였으며 조선 건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여인이었습니다. 신덕왕후는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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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과 세종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던 ‘그녀’ (1부) 실록엔 없는 그녀의 출생

정선공주(1404년~1424년)는 조선 제3대 왕 태종 이방원의 딸로 1404년(태종 4년)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4남 4녀 가운데 4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출생 사실은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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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규가 부마로 선택된 배경이자 공주의 시아버지가 된 권근(1352년~1409년)은 이색과 정몽주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문장에 능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후대에 경학과 문학의 양면을 잘 조화시킨 것으로 평가받은 인물이었습니다.

1369년(공민왕 18년) 18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이 되었던 권근은 1389년(공양왕 1년)까지 약 20년 동안 고려의 관료로 있게 됩니다. 이후에 유배를 가게 되면서 자연스레 공직에서 멀어진 그는 사면이 된 후에도 복직하지 않고 은거 생활을 하면서 학문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게 됩니다.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12명의 자녀를 봤음에도 후궁을 들일 수 밖에 없었던 태종의 속사정

태종 11년(1411년)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불화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원경왕후와 그녀의 집안은 태종 이방원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내조를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왕위에 오른 태종은 그것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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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세종의 큰누나, 태종의 첫째 딸! 정순공주 이야기

정순공주(1385년~1460년)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 이방원의 딸로,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85년(우왕 11년) 태종과 원경왕후의 4남 4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태종의 첫 자녀였던 그녀는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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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 되자, 권근은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출사하게 되었고 1393년(태조 2년) 정총과 함께 정릉(定陵)의 비문을 짓고 중추원사가 됩니다.

1396년(태조 5년)에 명나라 태조가 외교문서의 한 종류인 표전에 쓰인 문장을 문제 삼아 조선 사신을 억류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해당 문서의 작성자로 정도전을 지목하여 그를 압송하라고 요구하는 데, 이것이 바로 조선 건국 초에 명나라와 대표적인 갈등인 표전 문제입니다. 이에 권근은 정도전을 대신해 자진하여 명나라로 건너갔고 명 황제에게 표전 사건의 경위에 대해 해명을 하는 데 성공하면서 그는 양국 간의 외교적 마찰을 종식하는 데 크게 공헌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권근은 명나라에서 극진한 예우를 받았으며 귀국한 뒤에는 개국원종공신이 되어 화산군에 봉군이 됩니다. 또한 1398년, 8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이후에 권근은 정권을 잡은 이방원의 편에 서게 되면서 그의 위상은 이전보다 훨씬 높아지게 됩니다. 이는 권근의 학문적인 입장이 왕이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중앙집권체제를 만들려고 했던 이방원과 일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권근은 정도전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학자로 불렸는데 성리학 이론의 측면에서는 정도전보다도 더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이방원에 의해 제거된 상황에서 조선의 학계를 이끌어 갈 유일무이한 능력을 갖춘 이가 바로 권근이었기에 그는 왕자의 난 이후 관학 교육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1400년, 드디어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자기 딸인 경안공주와 권근의 아들 권규를 혼례 시키면서 태종과 권근은 사돈으로서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됩니다.

혼례 후 경안공주는 시부모를 섬기는데 예절을 극진히 하였고 가정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 권규도 태종의 신임을 받으며 중히 쓰이게 되는데, 1407년에는 중앙군인 5위중 하나인 호분위를 맡아 호분위상호군(정3품 당하관)의 직책을 맡았고 이듬해에는 조선의 3군 중 하나인 우군(양광도·서해도 및 서북면)을 지휘하는 우군도총제를 겸하게 됩니다.

1413년 명나라의 동정을 탐문하기 위해 사신으로 갔다 올 정도로 부마의 역할을 다하고 태종의 신임을 받았던 그는 그 공을 인정받아 1416년 길창군으로 다시 봉해집니다. 하지만 경안공주는 1415년(태종 15년)에 발열 증세를 보이다가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경안공주가 발열 증세를 보일 때 내의원에서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병이라고 진단을 하게 됩니다.

태종은 크게 슬퍼하며 경안공주를 애도하기 위해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한동안 육선(고기반찬)을 물리고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 경안공주의 장례는 불사를 거부한 부마 권규의 뜻에 따라 불교식이 아닌 대로 <예경>대로 행하는 유교식으로 치러지게 됩니다.

이후 1418년(태종 18년)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슬픔 끝에 격노하였고 내의원에서 경안공주와 성녕대군의 병명을 정확히 진단하지 못하였다며 의원 양홍달을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박거 등의 다른 의원들은 장형에 처했습니다. 이렇게 누나인 경안공주가 세상을 떠났을 때 충녕대군(세종)은 19살이었으며 그녀의 죽음에 수많은 형제들 중 가장 슬퍼했다고 합니다.

당시 충녕대군에게 경안공주는 그를 이해하고 인정해 준 사람이었으며 그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답해주는 또 다른 선생님이었습니다. 경안공주가 시집을 간 후에도 보내준 격려 서신과 위안은 혈기를 억누르고 서책에 매진해있는 충녕대군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동생 충녕대군에 관련된 미담과 칭찬을 태종과 원경왕후에게 자주 전하는 정치적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노년에 세종은 아직도 누이의 사색과 독서의 깊이를 따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할 정도로 일찍이 뛰어났던 그녀는 안타깝게도 요절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비교적 젊은 나이에 경안공주가 세상을 떠나게 되지만 다행히도 부마 권규와의 사이에서 2남 1녀의 자식을 두게 됩니다. 장남은 권담, 차남은 권총이었으며 딸은 어려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세종 3년(1421년)에 부마 권규마저 29세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경안공주의 두 아들들은 이른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게 됩니다.

실록에서는 권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길창군 권규가 졸하였다. 규는 권근의 아들이다. 상왕의 딸 경안공주에게 장가들어 숭정 대부의 계급에 오르고 길천군에 봉함되었다. 태종 16년에 길창군으로 고쳐 봉하고, 계급이 숭록 대부로 올랐다. 임금이 즉위한 뒤, 사랑과 대우가 특별히 달랐는데, 이때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29세이다. 부고가 보고되자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하고, 고기반찬을 들지 아니하기를 7일 동안에 이르렀다. 권규는 성격이 온후하고 자신을 겸손하게 가지며, 자기의 생활을 매우 검소하게 하고, 사랑과 공경으로 어머니를 섬겼다.”

“자기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쌀을 훔친 것을 청지기가 붙잡아서 아뢰니, 권규는 가난한 선비라 하면서 그대로 그에게 주었다. 조정의 사대부들이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애석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들은 권담과 권총이다. 시호를 제간이라 하였는데, 제(齊)는 마음 가지기를 매우 씩씩하게 한다는 뜻이요, 간(簡)은 한결같은 덕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종 3년(1421년) 4월 3일]

그런데 여기서 의문인 점은 경안공주의 졸기와, 권규의 졸기에서 모두 가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경안궁주가 졸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대·소염에 소용되는 물건이 부족하므로, 명하여 상의원의 의대로 부의를 주게 하고, 장사는 종친의 상등례를 쓰게 하였다.” [태종 15년(1415년) 4월 22일]

“지금 길창군 규의 상사에 대하여는 규정에 의하여 예장을 내는 이외에, 빈소를 드리고 염을 갖추는 기구를 모두 관가에서 준비하되, 장례는 중등으로 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것은 권규의 집이 워낙 가난하여, 저축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종 3년(1421년) 4월 3일]

익히 알려져 있는 태종의 성격상 사랑하는 딸이 시집을 갔는데 그냥 보냈을 리 없었고 경안공주의 친자매들에 관한 실록의 기록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당연히 큰 저택과 상당한 재산이 하가를 하면서 내려졌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이러한 기록이 남겨졌다는 것은 의문이 되는 부분입니다.

또한 부마 권규도 명문가 출신이었고 태종의 상당한 신임을 받아 요직을 거치며 부마로서 녹봉도 많이 받았을 것이기에 가진 것을 주변에 가난한 사람을 위해 다 퍼주었거나 아니면 큰 사건으로 인해 전 재산을 탕진하지 않은 한 일국의 공주와 부마가 가난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1413년(태종 13년)에 태어난 경안공주의 차남 권총은 공주가 세상을 떠났을 때 3살에 불과하였고 그가 9살이 되던 세종 3년(1421년) 아버지인 부마 권규도 세상을 떠나게 되자 태종은 외손주 권총을 안타까워하며 궁궐로 불러들이게 됩니다. 정조의 명을 받아 역대 왕들의 모범이 되는 행적을 모아 편찬한 <갱장록>에는 경안공주의 막내아들 권총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종은 말년에 외손자 권총을 몹시 귀여워했습니다. 어릴 때는 태종의 무릎에서 자랄 정도로 많이 아꼈다고 전해지는데, 부마 권규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권총이 궁궐 안으로 들어오면서 더욱 사랑받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종의 측근 신하 중에 수염이 긴 사람을 본 어린 권총은 호기심에 그의 수염을 뽑아버리게 됩니다. 물론 어린아이의 악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고 “신체발부 수지부모” 즉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은 어린아이가 저지른 것이었지만 문제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권총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는 공론이 일어났고 효라는 명분이 있었기에 막강한 권력의 태상왕 태종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태종은 “조정의 엄격한 예법을 생각하면 죽여야 마땅하지만 외손자가 어리고 무지하니 목숨만은 살려주시오.”라고 신하들에게 부탁을 하게 되면서 결국 권총은 큰 처벌을 받지 않고 숭례문 밖에 유폐되어 1년 이상을 지내게 됩니다.

얼마 후 중병에 걸린 태종이 “외손자가 몹시 보고 싶은데 조정이 무서워 만나보지 못한다.”라고 말하자 이에 신하들은 태상왕의 병을 고려해 권총을 사면해 주기로 하면서 그는 마침내 석방됩니다. 이후 권총은 부귀한 가운데 성장하였으나 교만하지 않았고 두루 관직을 거치며 성종 대에 이르러 지중추부사(정2품)에 오르게 됩니다.

지중추부사 권총의 졸기

“지중추부사 권총이 졸하니, 임시로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와 제사를 치르기를 예와 같이 하였다. 권총은 본관이 안동으로, 부마인 길천군 권규의 아들이다. 태종의 외손으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늘 궁중에 들어가 살았다. 그는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오르게 되었고 이때 이르러 졸하였는데, 나이 68세이었고 시호를 영정이라 하였다. 권총은 부귀하게 생장하였으나, 성품이 남에게 교만을 부리지 아니하였다. 늘 시와 술, 그리고 매와 개를 좋아해 스스로 즐겼다. 비록 시첩이 앞에 나열해 있더라도 극진한 호사나 탐욕을 부리지 않았다.” [성종 11년(1480년) 2월 11일]

이렇게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뜻하는 졸기에서 권총은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에 관한 실록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와 상반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세종 18년(1436년) 권총은 관비를 첩으로 삼은 죄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부사직 권총 등이 중국에 갔다가 돌아온 창가비(노래를 부르는 관비)를 교지를 어기고 첩을 삼았사오니, 그 죄를 장 1백 대에 처하고 함께 살지 못하게 하소서. 이에 왕은 이를 그대로 따르고, 오직 권총만은 의친(왕실의 일정한 범위 내의 친척)이라 하여 직첩만 거두고 외방으로 귀양 보냈다.” [세종 18년(1436년) 4월 16일]

뒤이어 권총은 궁녀 선금을 첩으로 삼아 또다시 대신들의 탄핵을 받게 됩니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권총이 일찍이 내시녀(궁녀)로 들어와 있던 선금을 첩으로 삼았사오니, 죄가 장 1백 대에, 도 3년에 해당합니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총이 창가비를, 교지를 어기고 첩으로 삼았다 해서 이미 벼슬을 빼앗고 외방에 귀양을 보냈으니 다시는 거론하지 말라.” [세종 18년(1436년) 4월 18일]

그리고 세종 21년(1439년) 경안공주의 장남이자 권총의 형인 권담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혼한 전처 박 씨에게서 낳은 딸 권영금에게 노비를 나누어 주었고 이 사실에 대해 권총과 백부 권제가 증인이 되어줍니다.

권담과 이혼한 전처는 금실이 좋았지만 1418년(세종 즉위년) 병조판서였던 장인 박습이 병사를 상왕 태종에게 품의하지 않고 처리한 죄로 사천에 유배되고 참수당하면서 문제가 됩니다. 이로 인해 나라에서는 권담 부부를 강제로 이혼시켰고 타의에 의해 권담은 공조판서의 딸인 정연과 재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권담은 전처 박 씨를 잊지 못하였는지 이혼 후 만남을 가져서 딸을 낳게 되었고 세월이 흘러 자신이 중병에 들자 전처와의 딸을 안타까워하면서 노비를 나누어 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해 후처 측에서는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면서 상속 시비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권총은 형의 옳지 않은 행동을 두둔하고 오히려 형수(후처)를 모함한 죄로 파직이 되지만 이듬해 세종의 명으로 관작이 회복됩니다.

1444년에는 권총의 양모가 경상도 성주에 있다는 이유로 권총이 그 고을의 수령이 되길 희망하였고 이에 세종은 그를 진주목사에 제수하려 했지만 대신들이 반대하면서 없던 일이 됩니다.

또한 수양아버지의 재산 상속을 둘러싼 분쟁에 대해서 권총이 상소를 올리자 신하들은 그를 처벌을 하자고 주장을 하지만 세종은 “사리를 알지 못하는 자를 한결같이 법률에 따라 다스릴 수 없다.”라고 말하였고 이에 대해 사관은 “권총은 길천군 권규의 아들인데, 호부(부유)한 집에서 생장하여 조금 심질(마음의 병)이 있어 하는 일이 광망(망령된)한 것이 많았다.”라고 평가하게 됩니다. [세종 30년(1448년) 4월 9일]

경안공주의 무덤은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덕평리에 있는 묘역으로 2007년 9월 7일, 경기도 기념물 제214호인 ‘제간공 권규묘역’으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 12월 26일 ‘제간공 권규·경안궁주묘역’으로 명칭이 변경됩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부마와 공주의 합장묘로 형식은 상하분으로 되어있으며 권규의 봉분이 위쪽, 경안공주 봉분이 아래쪽에 있습니다.

묘역의 경사가 급해 북쪽에 석축을 쌓았고 좌우로 곡장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경안공주의 무덤은 조성 당시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그 문화재적 가치가 아주 높은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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