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달라고 간청했을까?

2022. 10. 26. 00:06지식

그녀는 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달라고 간청했을까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영빈 이씨(1696년~1764년)는 조선의 제21대 왕인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어머니로 정조의 친할머니입니다. 그녀는 영조가 가장 총애하였던 후궁이자 두 번째 후궁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호는 의열이였으나 후일 소유가 추가됩니다. 증 찬성 이유번과 부인 한양 김씨 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본관이 전의였으며 거주지가 한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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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 이씨는 6살이 되던 1701년(숙종 37년) 궁녀로 뽑혀 입궁하게 되는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밀에 소속되어 대전에서 일하게 됩니다. 보통 궁녀는 공노비 중에서 차출되지만 왕이나 왕비, 대비, 후궁 등 웃전을 옆에서 직접 모시는 내명부의 부서인 지밀에서는 양인 출신을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편법으로 양인들을 입궁시키곤 했는데요. 영빈 이씨도 여기에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은 당시 나인이었던 영빈 이씨를 보고 "이 나이의 사대부 집 여자아이들은 어린 티를 면하기 어려운데, 민가의 여자는 조숙하여 이런 일까지 다 하는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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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영빈 이씨가 궁녀로서 입궁을 한 지 25년이 지나던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영빈 이씨는 31살의 나이에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영조의 승은을 입게 되는데요. 이는 당시 기준으로 중년에 가까운 나이였기에 의외의 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녀는 1726년(영조 2년) 11월 숙의에 봉해졌는데 후궁의 승급이 너무 빠른 게 아니냐는 신하들의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5개월 후인 1727년(영조 3년) 이씨는 영조와의 사이에서 첫 번째 자식인 화평옹주를 낳습니다. 이후 그녀는 자식을 낳은 공을 인정받아 그해 10월 귀인에 봉해졌으며, 1728년(영조 4년) 11월에는 후궁의 최고 품계인 정1품 영빈에 오릅니다. 이는 영조의 후궁 중 가장 높은 품계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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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도 같은 품계였지만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사후에 추증되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빈에 오를 당시 큰 논란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이는 당시 경종비 선의왕후의 국상 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조는 구설수에 오를 것을 감수하고 귀인이었던 이씨를 빈으로 승급시켰으며 큰 잔치를 베풀게 됩니다.

이렇게 영빈 이씨가 숙의에서 귀인을 거쳐 빈이 되기까지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녀에 대한 영조의 총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왕권을 이을 후계자를 봐야 하는 영조로서는 나이도 있는 데다 줄줄이 딸만 낳는 궁녀 출신의 후궁보다 더 어리고 배경도 좋은 후궁을 얼마든지 들일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빈이 그렇게 오래 총애 받음은 분명히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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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옹주를 낳은 후 영빈 이씨는 3명의 옹주를 더 낳았으나, 안타깝게도 봉작이 되기 전에 셋 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다시 영빈 이씨가 회임을 하자 이번에야말로 왕자가 태어나길 기대하게 됩니다. 이는 1728년 영조와 정빈 이씨의 아들인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왕자가 태어나지 못해 후계자인 세자의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1733년(영조 9년) 영빈 이씨가 다섯 번째 딸인 화협옹주를 낳자 영조를 비롯한 대신들은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왕실의 큰 어른인 대왕대비 인원왕후는 영빈 이씨가 거처를 옮기면 왕자를 낳을 것이라는 점을 보고 창경궁 집복헌으로 거처를 옮기라고 명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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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로부터 2년 뒤인 1735년(영조 11년) 1월 영빈 이씨는 41세의 나이로 드디어 바라던 원자를 낳게 되는데요. 이 원자가 바로 훗날의 장조, 즉 사도세자 혹은 장헌세자로 불리는 왕자였습니다. 원자는 이듬해인 1736년(영조 12년)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영조의 공식적인 후계자가 됩니다. 그리고 1738년(영조 14년) 영빈 이씨는 자신의 마지막 자식인 화완옹주를 낳으면서 영조의 왕비와 후궁 중 가장 많은 자녀(1남 6녀)를 낳은 여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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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궁녀로 입궁해 왕에게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된다는 것은 궁녀로서 최대의 출세였습니다. 이는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며 승은을 입고 승은상궁으로 봉해져도 왕의 방문이 끊겨 쓸쓸히 늙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운 좋게 후궁 첩지를 받더라도 왕에게 계속 총애받으며 왕의 자녀들을 낳아 기반을 다지기란 당연히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혹여나 왕자를 낳아 후궁 품계가 올라가는 경우는 있어도, 그 왕자가 장차 왕통을 이을 국본이 되어 세자의 생모가 됨은 더더욱 드물었는데요. 영빈 이씨는 조용히 이 모든 것을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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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온화한 성품이었으며 영조의 왕비인 정성왕후와도 돈독한 사이였습니다. 후일 인생의 가장 큰 경축일인 환갑을 맞이한 정성왕후가 영조의 냉대 속에 환갑연을 치르지 못했을 때 정성왕후의 환갑연을 하자고 간곡히 건의한 사람도 다름 아닌 영빈 이씨였습니다.

한편 1748년(영조 24년) 6월 그 누구보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맏딸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게 됩니다. 4년 후인 1752년(영조 28년) 11월에도 영빈을 닮아 미색이 뛰어났다는 화협옹주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가 낳은 1남 6녀 가운데 사도세자와 막내딸 화완옹주만이 남게 됩니다. 이중 막내인 화완옹주는 화평옹주가 죽자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한 딸이었는데요. 그녀는 훗날 자신의 양자 정후겸과 함께 조카인 정조의 즉위 과정에 개입하여 많은 잡음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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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 이씨가 낳은 아들인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총명하여 아버지 영조의 기대를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이렇게 총명한 세자에게 화가 될 수 있는 결정을 합니다.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세자를 생모 영빈 이씨와 떨어트려서 영조와 대립한 선의왕후 어씨(경종의 계비)가 생전에 살던 저승전에 머물게 하고, 경종과 선의왕후를 모시던 궁인들로 하여금 세자의 시중을 들게 한 것입니다. 저승전은 1730년 경종비 선의왕후가 죽은 후 오랫동안 비어있던 곳으로, 근처에는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가 머물면서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한 것으로 유명한 취선당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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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조는 이러한 취선당을 소주방으로 삼아 세자를 위한 음식을 만들게 한 것이었습니다. 후일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자신이 쓴 한중록에서 이러한 상황이 남편을 망치게 된 원인이라고 지적하면서 한참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아기를 품에서 떨어트려, 불길한 곳에서 키우게 해 사단이 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당시 영조는 선왕을 모시던 궁인들로 하여금 세자를 모시게 하여 유일한 아들인 사도세자의 권위를 세워주고, 자신이 경종을 죽였다는 독살설에서 벗어나기 위한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왕의 궁인들은 워낙에 친 소론 성향이었고, 영조의 뜻과는 다르게 동궁에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분란을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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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한중록에 따르면, 그들의 리더 격인 최상궁과 한상궁이 원흉이라고 언급하는데요. 그녀들은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를 업신여기고 헐뜯어서 세자와 멀어지게 했고, 공부를 게을리하게 만들기 위해 세자에게 병정놀이를 가르쳐 놀이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동궁의 궁인들이나 세자시강원의 기강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이 승정원일기에 나옵니다. 이를 안 영조는 매우 분노하였으며 몸소 저승전까지 가서 사도세자에게 꾸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자를 담당한 최상궁과 한상궁에게 호된 형벌을 내리고 궐 밖으로 내치라는 어명을 내렸으며, 결국 최상궁과 한상궁은 형벌을 받다 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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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로 인해 세자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영조로부터 극심한 불신과 꾸중을 받았으며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됩니다. 영조가 이렇게까지 사도세자를 압박한 이유는 괴팍한 성격이 문제이기도 했지만, 첫아들 효장세자의 죽음 이후 다음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늦게 본 것이 또 다른 이유였습니다.

당시 조선 역대 임금들은 격무에 시달려 환갑을 넘기기가 힘들었으며 평균 사망 나이가 40대 중후반이었습니다. 영조의 후계자인 사도세자가 태어났을 때 이미 영조는 42세였기에 다른 왕들을 기준으로 보면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조급했던 마음과는 다르게 그는 83세까지 장수했으며 당시에는 이를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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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15세가 되던 1749년(영조 25년) 영조는 자신의 체력이 약해져서 정양이 필요하다며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명합니다. 사실 이것은 영조의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세자에게 당시의 정국 운영을 익히게 하려는 목적이 더욱 컸습니다. 특히 노론과 소론의 첨예한 대립 속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파 간의 정치세력의 균형을 꾀한 탕평의 정치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기에 왕세자가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 정국을 운영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은 1749년에서 1762년까지로 이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긴 13년간에 걸친 대리청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의 정사의 처리를 두고 영조와 이견이 심했으며 결국 이로 인해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는 더욱더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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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사도세자는 영조의 타박과 압박으로 인해 점점 미쳐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세자의 비행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었고 점점 상황이 악화되면서 그의 아들인 세손(정조)의 지위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이 됩니다. 실제 사도세자는 1760년 이후로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세자는 일반 불안장애, 강박장애, 충동조절장애를 겪었는데 이때부터는 정신분열증으로 헛것까지 보게 됩니다.

혜경궁은 '경진년(1760년) 이후로 세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기억할 수조차 없다고 했으며, 심지어 1761년 1월에는 자신이 사랑하던 후궁인 빙애(경빈 박씨)까지 살해하게 됩니다. 결국 1762년(영조 38년) 김한구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이러한 사도세자의 비행을 폭로하면서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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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세자의 상태가 영조의 시해를 언급할 정도로 악화되자 어머니 영빈 이씨는 결단을 내리고 영조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녀는 영조를 앞에서 울며, 세자가 병을 앓고 있으니 임금을 보호하고 종사를 편하게 하기 위해 ‘대처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당시 세자에 대한 거취를 고민하던 영조에게 명분을 주게 됩니다. 아울러 영빈은 세손(정조)과 세손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에 대해 반드시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화가 세손에게까지 미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결국 얼마 후인 1762년 음력 윤 5월 21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고 서인으로 삼았으며 곧바로 휘령전 앞에서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어 죽게 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조선 왕실 최고의 비극 중 하나인 임오화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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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기로 결심했을 때, "나의 꿈에 정성왕후(영조비)가 나타나 '세자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라고 예지해 준 적이 있다"면서, 적모(嫡母)인 정성왕후의 현몽과 생모 영빈의 밀고를 근거로 내세우게 됩니다.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 발인 당시 영빈 이씨는 아들의 관을 붙잡고 통곡하였으며, 자식에게 못 할 짓을 하였으니 자신의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라며 고통스러워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영조는 세자가 죽은 지 보름 만에 세자의 지위를 회복시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부인인 혜경궁 홍씨에게도 ‘혜빈’이라는 빈호를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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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의 3년 상이 끝난 바로 다음 날인 1764년 음력 7월 26일, 영빈 이씨는 경희궁의 양덕당에서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에 영조는 영빈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후궁 일등의 예로 장사를 치르게 하고 직접 영빈의 묘지명을 지었는데요. 이렇게 왕이 후궁을 위해 지문을 지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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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임금이 된 지 2년에 영빈이 나의 후궁이 되었다. 1764년 7월 26일 경희궁 양덕당에 나를 하직하고 세상을 버렸으니, 오호라! 다시 볼길 없게 되었도다. 삼십 구 년간 해로하였는데 지금 한바탕 꿈이 되고 말았으니 내 슬픔이 너무나 깊도다. 다섯 달만 더 살았더라면 칠순이 되었을 것을,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일이로다. 빈은 성품이 온순하고 자애로워 나를 지성으로 섬겼으며, 여러 자식을 고루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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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임오년 일(임오화변)에 있어서 나라를 안정시키고 훈신과 백성을 보호한 것은 빈의 공이다. 이것이 어찌 아녀자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겠는가. 내가 어찌 조금이라도 과장하여 말하겠는가. 이는 온 나라의 신민들이 다 함께 말하는 것이다. 자식을 잃은 애통함을 참고서 3년을 보내고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나는 달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빈은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으며, 아내로서 속임이 없었으니 정말 신하로서나 아내로서나 부족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아 슬프도다!"

<어제영빈이씨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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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영빈 이씨의 묘지명에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날 당시 그녀가 종사의 대의를 위해 의리를 지켜서 사직을 보호하였다는 의미로 묘호를 의열이라 표시하였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765년(영조 41년) 영조는 정식으로 영빈 이씨에게 의열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그녀의 무덤과 사당은 의열묘와 의열궁이라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영조 사후 묘호와 궁호가 의열로 같은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또한 당시 왕위에 오른 정조가 의열의 뜻을 생각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두렵다며 아버지 사도세자의 일을 넌지시 언급하였기에 결국 의열궁의 궁호는 선희궁으로 바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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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 이씨는 정조에게 정말 좋은 할머니였지만 정조는 살아생전 할머니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회고합니다. 어린 나이(임오화변 당시 정조의 나이는 11살)에 친할머니가 아버지를 죽여달라 간청한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 용서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세월이 흘러 1899년(고종 36년) 고종은 사도세자를 추존왕 장조로 세웠으며, 영빈 이씨는 장조의 친어머니이기에 그녀의 무덤인 의열묘를 수경원으로 격상시키고 소유라는 시호를 추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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