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만 나면 겁탈에 패륜까지? 역대급 망나니였다는 '이 왕'

2022. 10. 12. 12:05지식

틈만 나면 겁탈에 패륜까지? 역대급 망나니였다는 '이 왕'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충혜왕(1315년~1344년)은 고려 제28대 왕으로 휘는 정, 몽골 이름은 부다시리(보탑실리)이며 원에서 내린 시호는 충혜왕, 동생인 공민왕이 올린 시호는 헌효대왕입니다. 그는 연산군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면이 있지만 고려시대 최악의 왕이자, 한국사에 손꼽히는 폭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충혜왕은 원 간섭기인 1315년(충숙왕 2년) 충숙왕과 명덕태후 홍 씨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나게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막장끼를 보였던 그는 지붕 위의 새를 잡는다며 고려의 국교가 불교임에도 불구하고 절에 방화한 뒤 도망가거나 술을 즐기고 불량배들과 어울려 걸핏하면 여자를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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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했으면 부왕인 충숙왕이 "너는 왜 망나니 같은 행실만 하느냐!"라고 대노하며 욕까지 할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충혜왕이었지만, 당시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었기에 왕의 큰아들이자, 세자로서 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는 즉위 이전에 원나라로 건너가서 원나라의 권력자, 엘리트들과 교류하고 원 황제와 황실에 대한 충성을 보이는 과정을 거쳐야만 다음 대의 고려 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충혜왕은 1328년(충숙왕 15년) 2월, 세자의 신분으로 원나라 수도인 대도에 가서 황제의 숙위를 담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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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충혜왕은 자신의 후원자가 될 원나라의 권력자 엘 테무르를 만났으며, 14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엘 테무르와 함께 사냥을 하고 술을 마시며 그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가 15세가 되던 1329년, 아버지 충숙왕은 아들에게 양위할 뜻을 내비치게 됩니다.

결국 이듬해 2월, 충혜왕은 원나라의 인정을 받고 정식으로 왕에 임명되었고, 다음 달에 진서무정왕 초팔의 맏딸인 덕녕공주에게 장가를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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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고손녀로 원 성종과는 6촌, 원 무종과 원 인종, 원 태정제와는 7촌 간이었으며, 당시 그녀의 아버지 진서무정왕의 작위는 원 황실 내에서 비교적 지위가 낮은 제왕이었으나, 초팔이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하면서 수 대에 걸쳐 황제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배경의 덕녕공주를 신부로 맞이한 충혜왕은 원에 머물렀으며 고려에 귀국하여 즉위식을 거행한 것은 그로부터도 6개월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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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충숙왕은 병을 이유로 아들에게 양위를 했지만 속사정은 복잡했습니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아버지 충선왕과 원나라의 끊임없는 간섭을 받았고, 사촌인 심양왕 왕고를 지지하는 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게 됩니다. 게다가 원 황실도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1320년부터 7명의 황제가 차례로 교체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원나라의 권력자 엘 테무르에 의해 문종이 원나라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그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고려도 그의 후원을 받는 충혜왕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됩니다. 또한 충혜왕과 결혼한 덕녕공주 집안 역시 엘 테무르를 적극 지지하고 있었기에 결국 압박에 못 이겨 아버지 충숙왕이 물러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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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즉위식을 치르러 고려로 오던 충혜왕은 원나라로 가던 부왕 충숙왕과 황주에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화려한 옷차림으로 길 위에서 아버지에게 호례, 즉 원나라에서 하던 대로 인사를 하게 됩니다. 이에 분노한 충숙왕은 "네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디서 나한테 호례를 행하느냐? 또 옷은 뭐가 그렇게 사치스러우냐?"라고 꾸짖었고, 이에 충혜왕은 그 서슬에 놀라서 울며 물러났다고 합니다.

참고로 부왕인 충숙왕은 어머니가 원나라 출신으로 순혈 고려인이 아니었기에 그냥 아들 자체가 탐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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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려 왕위에 오른 충혜왕의 첫 번째 재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총명하기는 했지만, 노는 것에 익숙했던 터라 정치보다는 술과 여자를 탐하고 사냥을 즐겼습니다. 이후 그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왕위가 위태로워지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린 것은 원나라였습니다.

당시 왕위를 빼앗긴 충숙왕은 원에 머물면서 사촌 아우 심양왕 왕고의 세력들을 포섭하는 등 왕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사건이 하나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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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황위 계승권자인 토곤테무르가 고려의 대청도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원 조정에서 충혜왕이 그를 옹립하고자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무고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충혜왕은 즉위 2년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고 충숙왕이 복위했으며, 그는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 황제의 숙위를 담당하게 됩니다. 또한 얼마 후 그를 지지해주던 엘 테무르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의 정적 바얀이 집권하게 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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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얀은 정권을 차지하자마자 엘 테무르 가문을 포함해 그와 관련된 세력들을 모조리 제거해버립니다.

그리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충혜왕이 위구르족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악행을 일삼는 것을 빌미로 바얀은 엘 테무르 사후 왕위에 오른 원 혜종(토곤테무르)에게 “충혜왕 왕정은 행실이 나빠 황제에게 누를 끼칠까 우려되니, 그 아비가 있는 곳으로 보내 올바르게 지도해야 합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1336년 충혜왕은 고려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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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버지 충숙왕과의 사이는 여전히 좋지 않았으며, 그는 자신의 아들을 '발피'라고 부르며 냉대했습니다. 하지만 충숙왕 역시 원 집권기의 현실의 벽에 부딪혀 정치에 뜻을 잃었으며, 신하도 만나지 않고 사냥과 음주 가무로 망가지다가 복위 8년 만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충숙왕이 눈을 감은 것은 1339년(충숙왕 후 8년) 3월의 일이었으나, 원나라의 결정으로 충혜왕이 다시 복위된 것은 그해 11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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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위 이후 충혜왕은 상식을 벗어난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후궁만도 100여 명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다 못한 기거주 이담의 충고와 전 군부판서 이조년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함이 없었으며, 결국 신하들과의 갈등이 더욱 심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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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9년 5월, 왕이 삼사좌사 홍융의 계실 황 씨를 간음했다.", "1339년 5월 경오일, 왕이 서모인 수비 권 씨와 정을 통했다.", "1339년 5월, 환관 유성의 처 엔씨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충혜왕이 구천우, 강윤충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유성더러 술을 올리라고 했고, 왕의 속내가 그 처를 꾀어내는 데 있는 줄도 모르고 유성이 행동거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몰래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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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9년 8월, 경화공주가 왕을 초대해 잔치를 열었는데 왕이 취한 체하며 궁궐로 돌아가지 않았고, 날이 저물자 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정을 통했다.", "1340년 3월, 예천군 권한공의 둘째 처 강 씨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호군 박이라적을 보내 궁중으로 데려오게 했는데, 이라적이 먼저 간통한 사실을 알고 노하여 두 사람을 모두 때려죽였다.", "1340년 8월, 날마다 사냥을 다니다 겨울이 되어 여의치 않자, 내시 전자유의 집에 가서 그의 처 이 씨를 강간하였고, 전에 때려죽인 바 있는 박이라적의 첩과 상간 하였으며, 재상 배전의 집에서 그의 처와 그의 아우 금오의 처를 번갈아 간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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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충혜왕은 여자면 상관없이 마구 겁탈했는데, 이 막장이 절정에 달할 때는 부왕의 후처 즉, 새어머니들을 강간했을 때였습니다. 1339년 5월에는 수비 권 씨를, 8월에는 원나라 출신의 경화공주를 나락에 빠뜨렸는데요.

이중 경화공주를 범할 때의 상황이 충격적이었으며, 이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충혜왕은 남편을 잃은 공주를 위해 향연을 베풀었고, 그녀도 그 답례로 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가 끝나자 충혜왕은 경화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저항하는 그녀를 아랫사람들을 시켜 사지를 묶고 범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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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경화공주는 원통함을 참지 못하고 원나라로 돌아가려고 말을 사려했으나, 이를 눈치챈 충혜왕이 이엄과 윤계종 등에게 명하여 마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여 그녀는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경화공주는 당시 심왕파이던 조적에게 자신이 강간당한 사실을 알렸고, 이를 충혜왕을 몰아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정승 조적이 심양왕 왕고와 모의 하에 경화공주 편에 서서 군사를 일으키면서 연경궁의 충혜왕 일파와 영안궁의 경화공주 일파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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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조적의 난이라고 부르며, 1,000여 명의 군사로 반란을 일으키고 왕궁 습격했으나, 이를 눈치챈 충혜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해 반격해오자 결국 패배하면서 조적은 경화공주의 처소에 숨었다가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후 충혜왕은 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만호 임숙의 집에 경화공주를 유폐시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막장 짓이 발각된 것은 얼마 후의 일로, 원나라에서 충혜왕의 복위를 인정하기 위해 국새를 가지고 온 사신 두린이 경화공주를 알현할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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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린은 원나라 황제가 하사한 술을 경화공주에게 바치지만, 그녀는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수치심에 울기만 합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두린이 수하들을 물리자 경화공주는 사실을 말하게 되고, 이에 분노한 두린 일행은 전격적으로 충혜왕을 체포해 원으로 압송합니다.

경화공주와 관련된 사건들은 아버지 충숙왕 사후에 곧바로 일어난 일이었으며, 이로 인해 충혜왕은 재집권 초에 원의 형조에 투옥되는 굴욕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운이 좋았는지 당시 원의 집권자 바얀이 축출되고 그의 조카 톡토가 집권하자, 충혜왕은 다시 석방되어 복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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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은 재위 시절 각종 오락을 즐기기도 했는데, 많지 않은 그의 고려사 기록의 상당 부분이 사냥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물론 사냥은 그 자체로 문제라고 할 수 없고, 당시 원나라 황제들도 주기적으로 사냥을 통해 숭무의 정신을 떨쳤기에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지만, 충혜왕과 함께 사냥을 수행하는 무리들이 무절제한 행동을 벌이며 민간에 매우 큰 해악을 끼쳤습니다.

이후에도 충혜왕은 음행을 멈추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 주위의 무리들이 왕을 사칭하고 부녀자들을 간음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충혜왕이 악행을 거듭하고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고려 신하들의 불만은 더욱더 커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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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가운데에서는 기황후의 형제인 기철과 같이 원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기황후는 바얀이 축출된 직후인 1340년 4월, 정식으로 원나라 황후에 책봉되었기에 고려에 있는 기 씨 가문의 세력도 급격히 커지게 됩니다.

그러나 충혜왕은 기 씨 가문과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니었고, 1341년 11월에는 기황후의 형제인 기륜과 충돌하여 그의 집을 헐어버리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갈등이 계속되자 기철을 비롯한 일부 신료들은 충혜왕의 패악들을 언급하며 고려에 원나라 내지와 같은 행성을 설치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입성책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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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국내외의 반발에 원 조정에서도 충혜왕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서 그의 왕위도 무사하지 못했습니다. 1343년 10월, 원의 사신으로 고려 출신의 환관인 고용보가 와서는 기습적으로 무력을 동원해 충혜왕을 체포함으로써 그의 폭정은 끝이 나게 됩니다.

당시 왕이 구타당하며 쫓겨나는 상황에서도 고려의 신료들 가운데 이를 저지하려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충혜왕이 원나라로 압송되어 가던 도중 평안남도 숙주에 이르러 지방관에게 이불을 요구하자, 그는 "왕이 탐욕과 음행 때문에 죄를 받았는데도 도리어 내 이불을 빼앗으려 한다."라고 하면서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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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원의 대도에 끌려온 충혜왕에게 원나라 황제 혜종이 말하길, "너 왕정은 왕이 되었으면서도 백성을 매우 심하게 착취하였으니, 너의 피를 천하의 개들에게 먹인다고 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짐은 살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귀양을 보낸다."라고 하며 계양현 즉, 지금의 광동성 조주라는 곳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보통 이런 식의 발언은 반란하려다 실패한 인물에게나 하는 것이고, 당시 원나라에서는 땅에 피를 흘리는 처형 방식을 매우 금기시한 것을 감안한다면 원나라가 충혜왕에 관한 일들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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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충혜왕은 정치적인 이유로 티베트로 귀양 간 할아버지 충선왕처럼 원나라에 의해 귀양을 간 2번째 고려 왕이 됩니다.

이러한 충혜왕의 유배 길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배지인 계양현은 수도에서 2만여 리나 떨어진 곳으로, 당시로서도 가장 무거운 죄를 지은 죄인들의 유배지였습니다. 이렇게 충혜왕은 유배지를 향해 긴 여정을 떠나게 되지만, 호송하던 함거가 너무 빨리 달리는 바람에 그는 온갖 고통을 겪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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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듬해인 1344년 음력 1월 15일, 충혜왕은 유배를 떠난 지 23일 만에 악양현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습니다. 항간에서는 귤을 잘못 먹고 체해 급사했다는 설과 독을 탄 술로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사실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후 그의 사망 소식이 고려로 전해졌으나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일부 백성들은 기뻐했다고 전해집니다. 유해는 고려로 송환되어 영릉에 안장되었으며 공교롭게도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그달에 충혜왕에게 수치를 당했던 경화공주가 한 많은 삶을 마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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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이르러서는 충혜왕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워낙 문란한 사생활로 인해 그의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재위 시절에 상업 활동을 통해 나라의 재정을 늘렸으며, 토지 문제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각종 세금을 부과해 권력층을 견제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혁 시도는 고려의 친원파와 갈등하는 요인이 되었고,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원나라에 의해 결국 그는 제거가 됩니다. 물론 당시 그의 개혁 정책은 권력을 백성에 위해 쓰지 않고 개인의 폭정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기에 일정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고려사>의 찬자는 그의 세가 말미에 다음과 같은 사평을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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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성품이 호협하고 주색을 즐겼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해 황음무도했다. 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친소와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 후궁으로 들였으니, 그 수가 백 명이 넘었다. 또한 재물에 관계되는 것이면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항상 이익을 올리려 했다. 군소배들은 뜻을 얻고 충직한 자들은 배척당하였으며,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여버리니 사람들이 죄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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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고려사>를 만든 조선시대 편찬자들이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킨 탓도 있지만, 그의 행동이 당시 고려 사회가 바라던 왕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고, 현대적인 상식으로도 용납되기 어려웠기에 충혜왕은 고려시대 최악의 폭군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린 두 아들이 각각 충목왕과 충정왕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둘 다 어린 나이에 요절하면서 동생인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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